그 혁명가는 왜 일제의 밀정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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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혁명가는 왜 일제의 밀정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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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승이 자수했음을 보여주는 취조 기록 1928년 8월5일자 ‘자수 조서(조기승)’. 국사편찬위원회 일본 경찰의 눈으로 보면, 조기승(趙紀勝)은 위험한 자였다.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을 품고 있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무지한 노동자’들을 선동해 노동운동을 벌일 우려가 있는 자였다. 그는 일상적으로 감시해야 할 요주의 인물이었다. 1925년 즈음에 작성된 경찰의 사찰 기록에 조기승의 신상 정보가 적힌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일본 경찰이 예의 주시한 ‘요주의 인물’ 사적인 정보도 포함돼 있었다. 키가 160.1㎝였다. 동년배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2.8㎝였음을 감안하면,1 중간보손해보험모집인
다 약간 작은 키였음을 알 수 있다. 얼굴 생김새는 코가 높고 눈이 큰 편이었다. 미남형이었던 것 같다. 위아래 치아에 금으로 된 의치가 있었다. 20대 중반인데도 치아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음을 알겠다. 충치 자리에 금니를 씌운 것을 보면 경제적으로 아주 쪼들린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경찰이 관찰하기에는 이렇다 할 자산은 없다고 평가돼 있다. 중소기업청 기술개발사업 종합관리시스템
소속 단체 항목에 천도교라고 쓰인 점이 주목된다. 그의 본적지인 ‘전라북도 김제군 김제면 옥산리 352번지’에는 오늘날에도 천도교 김제교구가 소재해 있다. 23살 되던 해에는 천도교 김제교구에서 설립한 천도교사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했다. 조기승 자신이 천도교와 관련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아마 선대부터 이미 천도교 전신인 동학과 관계가 있었던새마을금고 자유적금
것 같다. 김제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는 동학의 중심 거점이었고, 3·1운동 때도 만세 시위가 천도교 주도로 일어난 곳이었다. 조기승은 중등교육을 이수한 지식청년이었다. 고향인 김제에서 김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진학차 서울로 올라갔다. 1919년 3월 중등교육기관인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마친 뒤에는 교직에 진출했다. 19저축은행대출한도
20년부터 1923년까지 4년 동안 김제군에 소재한 진명학교와 천도교사립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결혼도 했다. 조씨 성을 가진 여성과 가정을 꾸려 1925년 현재 어린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경찰의 우려는 근거가 있었다. 청년 조기승은 교직 생활과 가정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김제를 근거지로 하여 ‘무지한’ 대중을 ‘선동’하고 국내 카드사
나섰다. 1922년부터 언론매체에 그의 민중운동 행적을 보여주는 기사가 등장한다. 벽성(碧城)소년단이라는 단체의 총재 직함을 갖고 있음이 눈에 띈다. 벽성이란 저수지 벽골제에서 유래하는, 김제의 옛 이름이었다. 그는 소년단이 주최하는 강연회에서 ‘연말의 계산’이라는 제하에 연사로서 무대에 섰고, 소년단 총재 자격으로 호남소년축구대회 개최를 기획하기도 했다.집담보대출연말정산
2 조기승을 밀정이라고 지목한 고려공산청년회 내부 문건.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사 문서보관소(РГАСПИ) 교사 그만두고 청년·노동자·농민 운동에 매진 1924년부터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전업으로 사회연소득4000만원
단체 활동에 착수했다. 소년단체만이 아니었다. 노동, 청년 단체에도 진출했다. 김제노농청년회 설립준비회를 이끌었고, 김제무산청년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김제노농동맹회 집행위원에도 선임됐다. 경찰이 우려했던 것처럼 노동자·농민운동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조기승은 김제군 내부에서만 활동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도 단위, 전국 단위 통합단체치킨창업
설립에도 진출했다. 도 단위 노동·농민운동 통합단체를 결성하고자 전북노농연맹 기성 발기회에 참여했고, 전국적인 청년운동 통합단체를 만들고자 조선청년총동맹(이하 청총) 창립대회에도 참석했다. 조기승은 아예 서울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그것은 청총 중앙 간부의 한 사람으로 취임한 사정과 연관돼 있다. 1924년 4월 서울에서 열린 청총 창든든학자금대출 상환
립대회에서 그는 중앙집행위원 2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청년운동의 전국적 집행부 성원이 된 것이다. 쟁쟁한 인물들로 이뤄진 이 명단에 포함됨으로써 조기승은 전국적 지명도를 갖는 명사 대열에 처음 올랐다. 이때부터 그는 청년운동 활동가로서 맹렬한 활약상을 보였다. ‘조기승’이라 일컬으면 저절로 청총 중앙 간부 이미지가 떠오를 정도였다. 정기적금 금리비교
몇 가지 두드러진 보기를 들어보자. 일본 경찰은 청총의 영향력 강화를 차단하기 위해 거의 모든 행사에 집회 금지 처분을 내렸다. 청총 집행부는 이에 대응해 집회 금지 이유를 묻고 금지 해제를 요청하기 위한 교섭위원을 파견하곤 했는데, 조기승은 그 단골 멤버였다. 1924년 11월에 한 차례, 12월에 한 차례, 이듬해 3월에 또 한 차례 교섭위원으로 선정됐다. 일본 경찰 앞에 출두해 당당히 교섭할 수 있으려면 성격이 담대하고 일본말을 잘 구사하며 경찰 내부의 생리를 잘 알아야 했다. 조기승은 그 적임자로 손꼽혔던 것 같다. 지방 출장도 자주 다녔다. 1924년 12월에는 전라북도, 이듬해 1월에는 경상북도 파견원으로 선임됐다. 각 지방 가맹단체와의 연락, 미가맹단체의 가맹 권유, 재정 분담금의 납부 독려 등이 그 소임이었다. 임기 만료로 새 집행부를 선출할 때가 오면 조기승의 역할이 더 무거워졌다. 경찰의 금압으로 정기대회 개최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부득이 전형위원 몇 사람을 선정해 차기 집행부 설계를 위임하곤 했다. 조기승은 1925년 6월 5명의 전형위원으로 선임됐고, 1927년 6월에도 또 한 번 전형위원이 돼서 차기 집행부 면면을 낙점하는 역할을 했다. 25명으로 구성된 청총 집행위원 중에서도 핵심 보직은 3~5명으로 이뤄진 상무집행위원이었다. 조기승은 1926년 12월 상무집행위원 3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고, 이듬해 4월에는 다시 상무집행위원 5명 중 하나가 됐다. 청총의 모든 사업과 조직을 총괄하는 막중한 책임과 권한을 쥐게 됐던 것이다. 조기승의 신상 정보를 기록한 일본 경찰의 사찰 문서. 왜정시대인물사료 2권 촉망받는 혁명가가 되다 조기승이 청총의 중앙 간부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일까? 그의 개인적 성의와 노력이 남달랐던 점이 먼저 꼽혀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의 자질만으로 그게 가능할 리 없지 않은가. 열쇠는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있었다. 조기승은 1924년 8월 공개 단체인 서울청년회에 가입했는데, 그때 그 단체 내부에 존재하는 비밀결사 고려공산동맹에도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 비밀결사 속에서 청년부 일을 맡았다. 1926년 하반기에는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둘로 나뉘었던 공청 비밀결사가 전격적으로 통합해 단일한 공청을 조직할 때의 일이었다. ‘합청’의 중앙 간부가 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공산당에도 가입했다. 조기승은 이 비밀결사 속에서는 경기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요컨대 공청과 당, 양 방면에서 간부급 대열에 진출한 것이다. 비밀결사 가입은 조기승에게 큰 활동력을 제공해줬지만, 그와 동시에 일본 경찰에게 탄압받을 가능성도 가져다줬다. 아니나 다를까 1928년에 접어들면서 그는 연거푸 두 차례나 검거 선풍에 휘말렸다. 그해 2월 종로경찰서가 적발한 조선공산당 제3차 검거 사건이 터졌고, 8월에는 경기도경찰부가 나서서 조선공산당 제4차 검거 사건을 일으켰다. 각각 전국에 걸쳐서 수백 명의 사회주의자가 체포됐다. 조기승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해 2월 검거시에는 요행히 비밀결사 행적이 드러나지 않아서 석방됐으나, 8월 검거 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8월5일 경찰에 체포됐다. 조기승이 체포된 지 6개월이 지난 1929년 2월25일의 일이다.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는 국제공청 앞으로 작성한 보고서에서 조기승에 관해 언급했다. “출회 회원 조기승은 1928년 8월 검거 사건시에 경기도경찰부의 밀정인 것을 확인하고 그를 출회시킴.”3 두 가지 정보가 눈길을 붙잡는다. 하나는 조기승이 경기도경찰부의 밀정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고려공산청년회에서 제명했다는 정보다. 놀랍다. 일본 경찰의 밀정이 비밀결사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조기승은 공산당의 경기도당 위원장이자 공청의 중앙집행위원을 지냈고, 경기도 위원회 책임비서를 맡은 최고위급 간부였다. 조선청년총동맹의 상무집행위원으로서 그 간판이나 다름없던 저명한 활동가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밀정 노릇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일본 경찰의 수사 기록을 들여다보자. 1928년 8월 검거 사건에 관한 경찰 취조 내용이 남아 있다. 경성지방법원이 편철한 ‘1929년도 박경호 외 형사소송기록’이 그것이다. 이 문서철 속에는 1928년 8월5일 작성된 조기승의 ‘자수 조서’가 수록돼 있다.4 17쪽 분량의 취조 기록이다. 그에 따르면 조기승은 8월5일 오전 10시 경기도경찰부에 출두해,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연루돼 있는데 자수하겠다는 뜻을 자발적으로 밝혔다고 한다. 이 문서에는 당과 공청의 비밀조직에 자신이 어떻게 연관됐는지, 자신이 속했던 비밀결사 구성원들의 성명과 역할이 낱낱이 기록돼 있다. 1928년 2월 공산당 검거 사건 당시 분주한 종로경찰서 정문 앞. 조선일보 1929년 11월1일치(호외) 열렬한 항일 혁명가이던 조기승은 왜 자수했을까. 무슨 이유로 동료 명단을 경찰에 순순히 넘겨줬을까.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중앙 간부급 혁명가의 변절은 비밀결사에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자수하기 이전 시기부터 경찰의 밀정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일단 자수한 뒤에는 자신이 아는 모든 비밀 정보를 경찰에 진술한 것이 틀림없다. 그로 인해 항일 비밀결사에 궤멸적 타격을 가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자수 이후 조기승은 어떻게 살았을까. 자수한 까닭에 ‘신병을 불구속한 채로 송치’한다는 경찰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석방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1930년 6월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실제로 복역한 것 같지는 않다. 설사 복역했더라도 매우 짧은 기간이었을 것이다. 선고 당시에 이미 체포된 지 근 2년이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해서 경찰 출두…일제 말엔 친일단체 가입 일제 말기의 행적이 일부 밝혀져 있다. 1938년 9월, 친일단체 사상보국연맹 신의주지부 결성식에 참가했고, 간사 17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된 바 있다. 해방 뒤에는 정계에 몸을 던졌다. 1950년, 1954년, 1958년, 1960년, 1963년 국회의원 선거에 연속 출마했으나 당선된 적은 없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참고 문헌 1. ‘일제 때 조선인 키 3㎝ 이상 줄어’, 동아일보 2016년 12월5일. 2. ‘碧城소년임시총회’, 동아일보 1923년 5월29일, 4면. 3. 고려공청 책임비서 李日千, ‘고려공산청년회 1929년도 제1회 중앙간부회의록’, 1929년 2월15~22일, 3쪽, РГАСПИ ф.533 оп.10 д.1904. 4. 경기도경찰부 사법경찰관 도경부 田邊孝 외, ‘자수 조서 (조기승)’, 1928년 8월5일, ‘1929년도 박경호 외 형사소송기록’ 경성지방법원, 48~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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